아담과 그리스도 (고전 15:20-23)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었다는 말씀이 20절과 23절에 나오고, 21절로 22절에서는 아담과 그리스도를 사망과 부활의 대표자로 대조합니다. Warren Wiersbe 목사님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Firstfruits: We have already noted this reference to the Old Testament feast (Lev. 23:9-14). As the Lamb of God, Jesus died on Passover. As the sheaf of firstfruits, He arose from the dead three days later on the first day of the week. When the priest waved the sheaf of the firstfruits before the Lord, it was a sign that the entire harvest belonged to Him.


When Jesus was raised from the dead, it was God’s assurance to us that we shall also be raised one day as part of that future harvest. To believers, death is only “sleep.” The body sleeps, but the soul is at home with the Lord (2 Cor. 5:1-8; Phil. 1:21-23). At the resurrection, the body will be “awakened” and glorified.


Adam: Paul saw in Adam a type of Jesus Christ by the way of contrast. The first Adam was made from the earth, but the Last Adam (Christ, 1 Cor. 15:45-47) came from heaven. The first Adam disobeyed God and brought sin and death into the world, but the Last Adam obeyed the Father and brought righteousness and life.


오늘은 특별히 21절과 22절이 말씀하는 아담과 그리스도의 대조에 대해서 상고하려고 합니다: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먼저 아담에 대해서 보면, 21절은 한 사람을 통해서 (by, through) 죽음이 왔다고 말씀하고, 22절은 아담 안에서 (in) 모든 사람이 죽는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원죄를 말씀하는 구절인데, 로마서 5 12절로 14절이 좀 더 자세히 말씀합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죄가 율법이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로마서 512절은 원죄를 3단계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한 사람 곧 아담의 불순종을 통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는 것이며, 둘째는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다는 것이고, 세째는 그 한 사람의 죄가 모든 사람의 죄가 되어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모든 사람이 아담 안에서 죄를 지었으므로 모든 사람이 죽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역으로 말하면, 모든 사람이 죽는 이유는 아담의 죄 때문이다는 것입니다. 그 아담의 죄가 원죄입니다.


이어지는 13절과 14절은 12절에 대한 보충 설명입니다.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도 이 세상에 죄가 있었으나, 죄를 정죄하는 율법은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는 율법이 없었기 때문에, 율법을 범한 죄인은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아담의 범죄와 같이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금하신 것을 범하는 죄를 지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금하신 율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람들은 살인도 하고 도적질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죄로 규정하는 율법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죄를 지었으나 죄인으로 정죄받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담으로 모세로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이 다 죽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의 삯인 사망에 이르렀다는 것은 그들이 죄 때문에 죽었다는 것인데, 무슨 죄 때문에 죽었는가? 바로 아담의 원죄 때문에 그들이 죽었다는 것이 13절과 14절에서 말씀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아담이 이렇게 모든 사람들에게 죄와 사망을 물려준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에게 의와 생명을 물려 주신 것을 미리 보여주는 표상이라고 14절 마지막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성경에 표상으로 번역되었고, 영어 성경에서는 pattern, figure, foreshadow 등으로 번역된 이 단어의 헬라어는 typos인데, 거기서 영어의 type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typos의 동사형은 “때리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typing은 자판을 두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type이라는 것은 어떤 글자의 유형 주물로서, 그것으로 종이를 두드릴 때에, 그 글자가 찍혀 나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실체를 미리 예시하여 주는 모형, 혹은 표상이라는 의미로 쓰이게 된 것입니다. 신학교 도서관에 가서 성경 해석학 책을 찾아 보면, typos라는 제목의 책들이 많이 있습니다. 구약에서 예수님의 모형을 찾아내는 모형론적 성경 해석 책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로마서 5 14절은 아담을 예수님의 표상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5 12절에서, 신자와 그리스도와의 관계와 대칭되는 아담과의 관계를 먼저 설명하는 것입니다. 원죄를 말씀하는 로마서 512절을 반대말로 표현하면 바로 복음이 됩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의가 세상에 들어오고, 의로 말미암아 생명이 왔나니, 이와 같이 생명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아담의 한 불순종이 우리 모두를 죄인으로 정해 놓은 것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이 그를 믿는 모든 자들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시도록 정해 놓으신 것입니다. 한편에서는 아담의 죄가 우리에게 전가되고, 다른 한편에서는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 됩니다.

        

오늘 본문 고린도전서 15 22절은 이것을 한마디로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인류의 첫번째 머리인 아담은 모든 사람들에게 죄와 사망을 가져 왔습니다. 인류의 마지막 아담인 예수님은 의와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 45절은 예수님을 ‘마지막 아담’이라고 칭합니다. 아담이 던져준 죽음의 문제는 마지막 아담으로 오신 예수님에 의해서 해결이 된 것입니다. Horatius Bonar라는 19세기 스콧틀랜드 신학자는 창세기 주석에서 처음 아담의 무덤과 마지막 아담의 무덤을 다음과 같이 비교하였습니다: “첫 아담이 죽음으로 그 안에서 우리도 죽는다. 그러나 마지막 아담이 죽음으로 그 안에서 우리는 산다. 첫 아담의 무덤은 오직 죽음 만을 선포한다. 그러나 마지막 아담의 무덤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선포한다. 한 무덤 속에는 어두움과 썩음과 죽음이 있다. 그러나 다른 무덤 속에는 빛과 썩지 않음과 생명이 있다. 첫 아담의 무덤에는 흙이 된 그의 몸이 있지만, 마지막 아담의 무덤은 빈 무덤이다. 첫 아담은 죽음의 첫 열매이며, 마지막 아담은 부활의 첫 열매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어떻게 첫 아담에 속한 우리를 구속하셨습니까? 우리의 자리에서 죄의 형벌을 담당하시고, 우리의 새로운 머리가 되셔서 부활과 영생의 길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죽음의 문제를 죽음으로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 54절로 57절에서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심으로, 예수를 믿는 우리에게도 승리를 주시는 것입니다


주일 학교 학생들에게 들려주는 이런 예화가 있습니다. 어느 여름날 한 아이가 마당에서 놀고 있는데, 어디서 날아왔는지 벌 한 마리가 왱왱거리면서 주변을 맴돌기 시작하였습니다. 피하려고 하면 따라오고, 쫓으려고 하면 달려들었습니다. 겁에 질린 아이는 엄마 품으로 달려가 안겼습니다. 엄마는 양 팔로 아이를 휘감고 양 손으로 아이의 얼굴을 가렸습니다. 성이 난 벌은 엄마의 팔을 힘껏 침으로 쏘았습니다. 엄마는 팔이 퉁퉁 부어오르고 매우 고통스러웠지만, 아이에게 말하였습니다. 이제 괜찮아, 내가 쏘였으니까 이제 저 벌은 더 이상 너를 쏠 수가 없어… 누가 승리한 것입니까? 벌입니까, 엄마입니까?


고린도전서 15 55절로 56절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사망의 쏘는 것을 우리 대신 담당하셨습니다. 곧 율법을 어긴 죄와 그 죄의 값인 사망의 저주를 주님이 대신 당하신 것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의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이사야 53 5절 말씀입니다.


죄를 죄되게 하는 것이 율법이고, 죄의 값이 사망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로마서 8 1절로 2절은 말씀합니다. 로마서 6 14절에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시고 사망의 쏘는 침을 대신 맞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죽으심을 통하여 승리를 쟁취하셨습니다 죽음과 승리의 역설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그러한 역설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죽을 때에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육체의 죄악된 욕망을 십자가에 못박을 때에 성령의 열매가 맺힙니다. 우리가 죽을 때에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의 영광을 추구합니다. 이생의 자랑을 추구합니다. 육체를 자랑합니다. 그러나 베드로전서 1 24절 말씀과 같이,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습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는 솔로몬의 말과 같이, 세상의 모든 영광은 헛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추구하는 것은 하늘의 영광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모세는 하늘의 영광을 얻기 위해서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받는 것을 거절하였습니다. 그래서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고난을 받는 길을 택하였고, 주님을 위해서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귀하게 여겼습니다. 왜냐하면 모세는 이 세상에서 잠시 누리는 헛된 영광을 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영원한 상급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도 장차 주님이 주실 썩지 아니할 의의 면류관을 바라보면서, 이 세상의 모든 자랑을 배설물과 같이 버렸다고 하였습니다. 로마서 8 17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리기 위해서는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한다고 말씀했고, 골로새서 1 24절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기쁨으로 동참하며,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헌신한다고 말씀했습니다. 바울은 장차 주님이 주실 썩지 아니하는 의의 면류관을 바라 보았기 때문입니다.  


계시록 3 21절에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의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오늘 수요 예배에 참석하신 모든 성도 여러분들도 자신을 부인하는 죽음으로써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한 역설의 삶을 통하여 하늘의 영원한 영광을 취하시기를 간절히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