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몸 (고전 15:35-50) The Resurrection Body

 

고린도 교인들 가운데는 죽은 자의 부활을 부인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12). 그래서 바울은 부활장이라고 불리는 15장을 기록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도 신자들의 마음 속에 부활에 대한 의심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특별한 분이니까 부활을 하셨지만, 과연 나도 부활을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확신이 없는 것입니다.

 

혹자는 시신을 화장해서 뼈가루를 깊은 바다에 뿌렸는데, 어떻게 다시 그 모든 살과 뼈가 모여서 부활을 할 수 있겠는가, 라고 말합니다. 여기에 대해서 Warren Wiersby 목사님은 resurrection is not reconstruction이라고 말하고, Charles Swindoll 목사님은 not simply a reconstitution of the dead parts of the decomposed body 라고 말합니다. 곧 말씀으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우리 몸을 부활시키실 때에, 꼭 죽은 시신의 잔재가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한 오늘날 부활에 대한 많은 오해도 많습니다. 자신을 born-again evangelical Christian으로 여기는 미국 사람들 중에 20%는 부활이란 다시 세상에 태어나는 것 (reincarnation) 으로 생각한다고 합니다. 불교의 윤회 사상과 비슷하지요. 그리고 죽은 자의 부활을 믿는 미국 기독교인들의 3분의 2가 육체가 없는 영혼의 부활을 믿는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 신령한 몸 (spiritual body)라는 구절에 대해서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오해합니다. 곧 부활체는 material이 없는 영체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Charles Swindoll 목사님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By calling resurrection body spiritual, Paul was not implying that it will be ghostly or immaterial. In fact, we will be like Christ physically (1Jn 3:2) able to do everything He did in His resurrected body (John 20:19-29; Luke 24:33-43).

 

Vernon McGee 목사님은 이런 실화를 소개합니다: Many years ago in the city of New York (in fact, it was way back in the day when liberalism was called modernism, back in the 1920s), they had an argument about whether resurrection was spiritual. The liberal even today claims its spiritual. He doesnt believe in bodily resurrection at all.

 

A very famous Greek scholar from the University of Chicago read a paper on the passage from this verse. His paper put the emphasis on the word spiritual. He concluded by saying, Now, brethren, you can see that resurrection is spiritual because it says its spiritual. The liberals all applauded, and somebody made a motion that they print that manuscript and circulated it.

 

Well, a very fine Greek scholar was there, and he stood up. And when he stood up, all the liberals were a little uneasy. He could ask very embarrassing questions. He said, Id like to ask the author of the paper a question. Very reluctantly, the good doctor stood up. Now doctor, which is stronger, a noun or an adjective? A very simple question, but Id like for you to answer it.

 

He could see the direction he was going and didnt want to answer it, but he had to. Well, he said, a noun is stronger, of cause.” “Now doctor, Im amazed that you presented the paper that you did today. You put the emphasis upon an adjective, and the strong word is the noun. Now lets look at that again. It is sown a natural body; it is raised a spiritual body.’”

 

He said, The only thing that is carried over in resurrection is the body. It is one kind of body when it dies, a natural body. Its raised a body, but a spiritual body, dominated now by the spirit but its still a body. And, you know, they never did publish that paper. They decided it would be better not to publish that paper.

 

May I say to you, just a simple little exercise in grammar answered this great professors whole manuscript and his entire argument which he presented at that time.

 

그처럼 부활의 몸은 뼈와 살이 없는 영체가 아니라, 신령한 몸이라고 한다면, 과연 어떤 몸인가? 그 점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씨의 비유를 통해서 설명합니다. 이 비유는 예수님의 밀알 비유와 유사합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 12:24). 땅에 떨어진 씨가 죽어서 썩을 때에, 거기서부터 많은 열매가 맺힌다는 것입니다.

 

바울도 오늘 본문 36절에서 38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의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또 너의 뿌리는 것은 장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갱이 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저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이 세상의 육신은 죽어서 땅에 묻혀서 썩습니다. 그처럼 죽지 않으면, 부활은 없습니다. 그리고 뿌리는 씨는 씨가 죽고 나오는 새 생명의 모습과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마찬 가지로, 땅에 묻힌 죽은 몸과 부활의 몸은 같으면서도 다릅니다. 사과의 씨를 뿌렸는데, 그 보잘 것 없는 씨로부터 크고 멋진 사과 나무가 나와서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사과 씨로부터 사과 나무가 나오고, 배 씨로부터 배 나무가 나온다는 면에서continuity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과 씨와 사과 나무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면에서 discontinuity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내가 입고 있는 몸과 나의 부활체는 둘 다 나의 몸입니다. 다른 사람의 몸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몸과 부활체는 질적으로 완전히 다르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질적인 차이를 도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LABC)


Physical Bodies (육체)

Resurrection Bodies (부활체)

Perishable (썩을 것)

Imperishable (썩지 아니할 것)

Sown in dishonor (욕된 것)

Raised in glory (영광스러운 것)

Sown in weakness (약한 것)

Raised in power (강한 것)

Natural (육의 몸)

Spiritual (신령한 몸)

From the dust (땅에서 났음)

From heaven (하늘에서 남)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모든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며 썩어짐에 종노릇하는 것을 보여 주심으로써, 새 하늘과 새 땅을 소망하게 하십니다 ( 8:21-21). 날마다 늙고 병들어 가는 육신을 바라 보는 가운데, 몸이 구속되는 날을 소망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육신이 나날이 후패하여 가는 것을 보고 절망하게 하십니다.

       

영생교 교주는 자기 교회에 나오면 늙지도 않고 병들지도 않기 때문에, 할아버지들의 다리가 팽팽해지고, 할머니들이 다시 임신을 할 수 있다고 선전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통하여 절망하고,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것을 소망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눈에 보이는 것을 소망하게 하는 거짓 교사입니다.

 

로마서 8 20절은 만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하였습니다. 아무도 그 법칙을 어길 수 없습니다. 시편 90편은 말씀합니다: “주께서 사람들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리 의학이 발달하여 인간의 수명을 늘여 놓았지만, 허무한데 굴복하고 썩어짐에 종노릇하는 인간의 운명을 바꾸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곧 썩어질 몸이 썩지 아니할 몸으로 다시 사는 마지막 날, 곧 우리 몸이 구속되는 날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부활의 몸은 영광스럽다고 하였습니다. 빌립보서 3 21절에서 바울은 주님이 재림하실 때에, 우리의 비천한 몸을 영광의 형체로 변케 하여 주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고린도전서 15 51절도 우리가 “마지막 나팔 소리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여,” 썩지 아니할 몸으로 다시 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요한일서 3 2절도 미래의 영광스러운 소망을 붙들라고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라.

 

주님도 이 땅에서는 비천한 삶을 사셨습니다. 베들레헴 말 구유간에서 나시고, 천대받는 땅 나사렛 시골에서 목수로 일하셨습니다. 주님께서 하늘의 모든 영광을 포기하시고, 이 땅에서 비천한 삶을 사실 때에, 세상은 그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환영 받지 못하였습니다. 외로움과 슬픔을 체험하셨습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주님은 더 이상 비천한 상태에 처해 계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지금 영화로운 상태에 계십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그 영화로우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요한은 밧모섬에서 그 영화로우신 주님을 보았습니다. 요한은 우리가 바로 그와 같이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지금은 우리가 비천한 상태에 있지만, 죄의 권세 앞에 아직도 위협당하고, 육체의 질병으로 신음하고, 죽음 앞에 겁을 내는 연약한 존재이지만, 주님께서 그러한 상태를 벗어나 영광의 상태에 들어 가셨듯이, 우리도 주님과 같이 영광의 상태에 들어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약속을 믿는 크리스챤에게 절망과 낙심은 없습니다. 고린도후서 4 16절 이하는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그처럼 고린도전서 15장 말씀은 일차적으로 몸의 부활을 말씀하는 것이지만,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으로 거듭나는 영적인 부활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44절의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산다고 말씀을 로마서 8 5절의 육신을 쫓는 자와 성령을 쫓는 자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육의 몸으로 심고 영의 몸으로 다시 산다는 말씀을 육신을 쫓는 자로서의 나는 죽고 성령을 쫓는 새사람으로 부활하는 거듭남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43절에 보면,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산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죽을 때에는 약한 모습으로 죽지만, 장차 주님 재림하시어 부활할 때에는 강한 자로 부활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도 우리의 영적인 부활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2 9절로 10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우리는 예수님과 연합함으로 미래의 육체적 부활에 동참할 뿐만 아니라, 현재의 영적 부활에도 동참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연합함으로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가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 17절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거듭난 사람은 죄를 물리칠 힘을 얻습니다. 새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있는 자가 됩니다.

 

한국에 처음 복음이 들어왔을 때에 김익두라는 평양의 유명한 깡패가 훌륭한 목사님이 된 역사가 있습니다. 그 분이 예수를 믿고 제일 먼저 한 일 가운데 하나가 부고장을 돌린 일이었다고 합니다. “김익두 사망”이라고 쓴 부고장을 마을에 돌렸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그 놈 참 잘죽었다’고 기뻐하였는데, 어느 날 보니까 버젓이 살아서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옆구리에 성경 책을 끼고 전도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동네의 어떤 불량 청년이 ‘죽기는 뭘 죽어 이 사기꾼아’ 라고 하면서 바가지로 물벼락을 씌웠습니다. 김익두는 태연히 물을 털면서 이렇게 말하였다고 합니다. ‘김익두가 죽었으니 망정이지, 김익두가 살았다면 너는 오늘 요절났다.’ 예수님의 죽음과 함께 강패 김익두는 죽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김익두는 크리스챤으로 새롭게 태어난 것입니다.

 

영적인 부활은 그처럼 죄의 종을 의의 종으로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세상의 온갖 풍파를 넉넉히 이기는 힘을 줍니다. 부활이란 헬라아로 anastasis, 다시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은 직업을 잃었을 때에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어떠한 인생의 위기 가운데에서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어떠한 실패 가운데에서도 다시 일어섭니다.

 

예수를 믿는 자에게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 면제되는 것이 아닙니다 ( 8:35).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온갖 고난을 당합니다. 성경은 믿는 자에게 고난이 임하지 않는다고 결코 말씀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긴다”고 말씀합니다 ( 8:36-37).

 

부활 신앙은 그처럼 죄의 종을 의의 종으로 변화시키고, 세상의 온갖 풍파를 넉넉히 이기는 힘을 줄 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죽음의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히브리서 2 14절로 15절은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목적 가운데 하나는, 사망의 세력 잡은 자 마귀를 멸하시고, 죽음이 두려워 일생 죽음에 종노릇하는 모든 사람들을 죽음의 공포로부터 해방시키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죽습니다. 그러나 부활 신앙은 죽음의 두려움을 물리칠 수 있는 능력을 줍니다. 죽음 앞에서 부활 신앙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은 확연히 구별이 됩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은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부활의 소망으로 이기며, 나아가서 자신의 죽음 앞에서도 담대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부활 신앙은 우리의 생명을 드리는 순교의 능력까지 줍니다. 아브라함은 부활의 신앙 가운데 이삭을 바칠 수 있었습니다. 히브리서 11 19절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하고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쳤다고 말씀합니다. 히브리서 11 35절은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않았다”고 말씀합니다. 믿음의 선조들은 순교까지도 부활의 신앙으로 담대하게 감당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순교자들은 결코 그들의 생명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었던 것입니다. 주님도 십자가의 죽음을 감당하실 때에 부활의 영광을 바라보셨습니다. 히브리서 12 2절은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부활은 완전히 죽은 후에 일어나는 영광의 사건입니다. 죽은 자에게만 부활이 있습니다. 부활의 능력을 삶 가운데 드러내기 위해서는 날마다 온전히 죽는 순교가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옛 사람을 그 정과 욕심과 함께 온전히 십자가에 못박으실 때에, 세상의 온갖 풍파를 이기고, 죽음의 두려움을 몰아내며, 가장 귀한 생명까지 드릴 수 있는 부활의 능력이 여러분의 삶 가운데 풍성하게 드러나시기를 바랍니다.

 

At the age of 28, Benjamin Franklin wrote this mock epitaph.

 

The Body of

 B. Franklin, Printer;

Like the Cover of an old Book,

Its Contents torn out,

And stript of its Lettering and Gilding,

Lies here, Food for Worms.

But the Work shall not be wholly lost:

For it will, as he believ’d, appear once more,

In a new & more perfect Edition,

Corrected and amended

By the Author. 

 

It is interesting to note that Franklin (1706-1790) – Founding Father of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foreign diplomat, statesman, author, soldier, scientist, author, inventor, printer – a true Renaissance man, a polymath – chose to refer to himself simply as a “printer” and liken his dead body to an old bo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