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고후 6:1-2)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권한다고 할 때에 쓰인 헬라어가 parakaleo 입니다. 성경에서 위로의 성령님을 가리켜서 parakleitos 라고 부릅니다. 우리 성경은 보혜사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러므로 1절에서 사도 바울이 권한다는 단어는 고압적인 자세로 명하는 것이 아니라, 따뜻한 마음으로 간곡히 권한다는 뜻입니다. NLT 성경은 beg로 번역하였습니다.

 

바울은 그처럼 따뜻한 마음으로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부탁합니다. 주석들을 보면,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는 구절의 의미에 대해서 다양한 견해들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 시간에는 no purpose, no result, no appreciation, 세 가지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은혜를 주시는 목적을 잊어버릴 때에, 주신 은혜에 대한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할 때에, 그리고 크신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지 못 할 때에, 은혜를 헛되이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이 은혜를 주실 때에는 주시는 목적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27절에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은사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욕심으로 은사를 구할 수 있습니다. 내가 더 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병고침의 은사를 구할 수 있습니다. 방언하는 사람과 차별화를 위해서 통변을 구할 수 있습니다. 전에 한국에서 어떤 자매가 철야기도를 하면서, 환상을 보여 달라고 떼를 쓰면서 기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분명 교회를 위해서 환상을 구하는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황홀한 체험을 하고 싶은 이기적인 욕심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런 예화를 읽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잘못된 목적에 사용하여서는 안된다는 내용입니다. 러시아 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니콜라이 2세가 (1868-1918) 나라를 다스리는 동안 외교와 정치 등 모든 분야에 걸쳐서 니콜라이 2세를 조정하던 ‘라스푸틴’ (Grigory Yefimovich Rasputin, 1872-1916) 이라는 수도사가 있었습니다

 

본명이 노비흐 (Grigory Yefimovich Novykh)인 그는 시베리아의 한 촌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학교에 다니긴 하였지만, 글을 모르고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러시아 말로 ‘방탕한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라스푸틴’ 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방탕한 삶을 살던 그는 18세 때에 하나님의 크신 은총을 경험하고서 수도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한 곳에 머물지 못하고 그리스와 예루살렘 등 여러 곳에 떠돌며 생활하게 되었고, 가는 곳마다 병든 사람을 고쳐주고 예언를 해 줌으로서 농민들로부터 ‘성자 - 영적 지도자라는 추앙을 받게 됩니다

 

그러다가 러시아로 돌아와 상트페테르부르크 궁정에 출입하다가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아들 알렉세이의 혈루병을 기도로 고쳐줍니다. 이 일로 인해서 그는 황제와 황후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게 되고, 점차 정치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합니다. 정치의 달콤한 맛에 취한 라스푸틴은 정치적으로 자기의 세력을 확장해 나갔습니다. 황제의 가족들 앞에서는 겸손하고 신성한 모습을 보이면서, 왕궁 밖에 나가서는 예전에 방탕했던 삶을 탐닉했습니다. 자신과 육체적으로 접촉을 하면 정화와 치료의 효과를 볼 수 있다고 설교하면서, 많은 여자들을 유혹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황후와의 염문이 나돌기도 했고, 주변에서 라스푸틴의 비행에 관한 보고서가 올라왔음에도 황제는 이를 묵살하고, 라스푸틴을 절대적인 신임하게 됩니다

 

특별히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황제 리콜라이 2세는 직접 군대를 이끌기 위해서 전방 부대로 떠나면서 러시아의 모든 내정을 황후에게 맡기자, 라스푸틴은 황후의 개인고문 역을 맡으면서 실질적인 정치적 실세 역할을 하게 됩니다그를 제거해야만 러시아의 재난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그를 죽이기 위해서 몇 차례 살해 시도를 하다가, 마침내 그는 1916 12월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그의 죽음에 대한 이런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습니다. 황제의 사촌을 비롯한 그를 반대하는 무리가 그를 암살하기 위해서 한 파티에서 그에게 독약이 든 포도주와 케이크를 먹게 합니다. 독약이 든 포도주를 마셨음에도 죽지 않자 총을 쏘아 그를 죽이려 하였습니다. 총을 맞았음에도 죽지 않고 도망치자, 그를 붙잡아서 밧줄로 묶어 네바 강의 얼음 구덩이에 빠뜨려 죽이고 맙니다. 그리고 라스푸틴이 살해된 후 불과 몇 달 뒤에 러시아에서는 혁명이 일어나게 되었고, 라스푸틴의 농간에 놀아난 러시아 제국은 결국 망하고 말았습니다

 

라스푸틴은 하나님께 큰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예언의 능력과 병 고치는 능력까지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 그 귀한 은혜와 능력을 바르게 사용하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는 그가 더 가난하고 더 연약한 사람들을 위해 그 은혜와 은사를 사용하기를 원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라스푸틴은 권력의 맛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그 귀한 능력과 은혜를 자신의 욕망과 야욕을 채우는데 사용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자신의 생애도 비참하게 끝나고 말았을 뿐만 아니라, 나라를 망하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은혜를 주신 목적을 상실하였기 때문입니다.

두번째로, ‘헛되이 (in vain) no result를 의미합니다. 은혜를 받고 그에 따르는 열매가 없다면, 은혜를 헛되이 받은 것입니다. Philip Hughes suggests that for them to receive the grace of God in vain meant that their lives were so inconsistent as to constitute a denial of the logical implications of the gospel, namely, and in particular, that Christ died for them so that they might no longer live to themselves but to His glory.

 

LABC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는 구절에 대해서 많은 해석이 있음을 인정하면서, 이렇게 주석하였습니다. Most likely, Paul was urging the Corinthians to take God’s grace seriously: to live up to the gospel’s demand. Paul was most likely imploring the Corinthians, who had already accepted Jesus, to live up to their profession of faith.

 

곽선희 목사님의 설교에 나오는 예화입니다. 아일랜드 출신 작가로 유명한 오스카 와일드라는 분이 쓴 우화적인 단편소설이 있습니다그는 특별한 소재에 착안을 했습니다예수님께서 은혜 베푸신 사람들이 많고, 예수님께로부터 은혜받은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많은 문둥병자들을 고치셨으니, 고침 받은 사람들은 얼마나 큰 은혜를 받았습니까? 심지어 죽은 사람을 살리셨으니 그 얼마나 감사할 일입니까

 

성경에는 그처럼 많은 은혜받은 사람들이 그 다음에 어떻게 살았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거의 없습니다. 은혜를 받고는 그 다음에 어떻게 살았다는 이야기가 거의 없습니다. 오스카 와일드는 그것을 나름대로 추리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과거에 은혜를 베푼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만나본 일이 있다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합니다

 

어떤 곳에서 예수님이 알코올 중독자를 만났습니다. 보니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았습니다. "내가 당신을 어디서 본 일이 없습니까?" 그 사람이 대답합니다. ", 있었지요. 저는 본래 절름발이 이었는데 예수님께서 고쳐주셔서 제가 이렇게 걷게 되었습니다. 절름발이였을 때에는 이렇게 저렇게 얻어먹고 살았는데, 건강해지고 나니 할 일이 없어요. 또 누가 나를 불쌍히 여기지도 않고 해서, 이럭저럭 하다 보니 타락해서 이렇게 알코올중독자가 되었습니다." 

 

또 한사람을 만났는데 이 사람은 창녀였습니다. "아니 내가 너를 창녀일 때에 용서하고 구원했는데, 아직도 창녀인 것이냐?" 하고 예수님이 꾸중하듯이 물었더니, 창녀가 대답합니다. "물론이지요. 제가 예수님께 구원받고 새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의 딸이 되고 감사해서 창녀생활을 청산했었지요. 그런데 아무도 거들떠보는 사람이 없고 갈 데도 없고 할 일도 없고 그리고 무엇보다 외로워서 살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옛날 직업으로 돌아와서 삽니다." 다시 창녀가 되었답니다

 

또 한 곳에 가서 예수님이 만난 사람은 싸움질을 하고 있는, 아주 혈기와 주먹이 있는 조폭을 하나 만났습니다. 가만히 보니 옛날에 본 사람이었습니다. "자네는 어떻게 폭력배가 되었나?" "예수님 죄송하지만 저는 원래 시각 장애자였는데 예수님께서 저의 눈을 뜨게 해주셨습니다그래서 감격하고 감사했습니다만, 눈 감았을 때는 몰랐는데, 눈뜨고 보니까 아니꼬운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더럽고 치사하고 모순되고 부조리하고 부정부패 사치와 타락, 여기에 울분이 터져서 주먹을 쓰다 보니 조폭이 되었습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예수님께로부터 은혜를 받았다, 예수님으로부터 구원받았다 하는 사실까지는 좋은데, 그 다음에 그가 어떻게 살았는가? 은혜를 지켜가며 은혜 안에 살았나, 그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127절은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고 말씀합니다. 복음을 믿고 구원을 받았으면,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한다는 것은 구채적으로 무엇인가? 빌립보서 127절은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고 말씀한 후에, 곧바로 일심으로 서서 한 뜻으로 신앙을 인하여 협력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한 마음 한 뜻으로 복음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 그것이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는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를 King James 성경으로 보면, let your conversation be as it becometh the gospel of Christ 라고 번역하였습니다. 너희 대화를 복음에 합당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복음의 합당한 생활의 제일은 입으로 하는 대화라는 것이지요. 복음에 합당한 대화를 하라. 복음은 진리입니다. 복음에는 거짓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에 합당한 말에는 무엇보다도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그리고 진실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4 25절부터 32절까지 옛사람과 새사람의 삶을 구체적으로 비교합니다. 마치 죄수가 감옥에서 나올 때에는 죄수복을 벗는 것과 마찬 가지로,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죄인의 삶을 청산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새로운 신분, 곧 거룩한 의인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대조하는 옛사람과 새사람의 모습 가운데, 첫번째가 언어 생활입니다: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

 

우리가 거짓을 버리고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되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몸과 지체는 사도 바울이 교회에 대하여 애용하는 비유입니다. 지체 간에 서로 속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몸을 해치게 됩니다. 교회에서도 거짓말을 하면, 지체 간에 신뢰가 무너집니다. 한 마음 한 뜻 하나 됨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결국 거짓말은 주님의 몸 된 교회를 해치는 중대한 죄가 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에 보면, 우리 몸에서 가장 통제가 힘든 지체가 혀라고 하였습니다. 혀가 내 마음대로 안됩니다. 참된 믿음의 증거는 통제된 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순절에 성령님이 강림하셨을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성령님이 사람들의 혀를 통제하셨습니다.

 

야고보서 3장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보라 어떻게 작은 불이 어떻게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혀는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작은 불씨 하나가 큰 숲을 다 태우는 것과 마찬 가지로, 말 한마디가 가정과 교회를 파괴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불씨는 지옥 불에서 나온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세 치 혀를 가지고, 지옥의 불씨를 던지며, 교회를 파괴하는 무서운 죄를 지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가 믿습니다. 믿음은 거짓 위에 세워질 수가 없습니다.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도 진리 위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복음에 합당한 언행으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우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은혜에 대한 감사가 없으면, 은혜를 헛되이 받은 것입니다. Warren Wiersbe 목사님은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간곡히 권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an appeal for appreciation 이라고 보았습니다.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바울이 사역을 하면서 얼마나 어려움을 많이 겪었는지를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자신들에게 복음전 전해주고 교회를 세워준 바울에 대한 감사가 없었습니다.

 

문단열 전도사님의 신앙 강좌를 유튜브로 몇 편 보았는데, 그런 내용이 기억에 남습니다. 익숙함이 신앙 생활의 적이다. 익숙함이 감사와 감격과 기쁨을 빼앗아 가는 도적이다. 일례를 들어서, 어머니가 날마다 도시락을 싸 주시는데, 도시락을 열 때마다 감격해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몇 년 동안 매일 싸 주셨기 때문입니다.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감사는 커녕 불평을 하기 일쑤입니다. 오늘도 계란 말이와 멸치 볶음과 김치란 말인가? 그러다가 만약 어머니가 갑자기 젊은 나이에 돌아가시면, 그때서야 어머니가 매일같이 싸 주시던 도시락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서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은 먹을 것이 없는 광야를 통과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를 내려 주셨습니다. 만나는 아침마다 이슬처럼 지면에 내렸는데, 그 모양은 갓씨 같고 색깔은 희고 맛은 꿀 섞은 과자 같았다고 하였습니다 (16:31). 처음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꿀송이처럼 달다고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날마다 만나를 먹고 또 먹고 하니까, 감사한 줄 모르고 불평을 하기 시작합니다. 날마다 내려오니까 귀한 줄 모르고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나아가서 싫증을 내고 불평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 하면서 불평하였습니다. 만나는 하나님이 하늘로서 내려주신 놀라운 은혜였습니다. 그것도 날마다 내려 주셨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러나 오히려 날마다 내려 주시니까, 당연한 것으로 알고 감사한 줄 모르고, 불만을 터뜨리고 불평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감사치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불뱀들을 보내서 물게 하셨습니다.

 

성경은 익숙함 때문에 은혜의 감격을 잃어버리는 것을 첫 사랑을 잃어버렸다고 표현합니다. 19세기 영국의 영적인 지도자 Octavius Winslow는 첫사랑을 잃어버린 징후들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관심의 대상에서 자꾸 멀어진다; 어린 아이처럼 하나님을 신뢰하고 따르는 단순한 믿음이 상실된다; 환경이나 일 때문에 자주 하나님께 불평하고 원망하게 된다; 신앙 생활이 특권이 아닌 의무로 느껴진다; 하나님과의 동행이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그리스도가 그다지 영광스럽고 귀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주님의 일에 대한 관심과 열심이 항상 뒤쳐지고 자기 일에 매여 살게 된다; 다른 성도들에 대한 사랑의 관심이 줄어들고 미움과 불평이 생긴다. 혹시 이러한 징후들이 여러분이 영적인 건강에 적신호를 보내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특별히 오늘 본문 2절은 지금이 은혜의 때요, 구원의 날이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현재가 영어로 무엇입니까? Present, 선물입니다. 지금 이 순간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우리가 오늘 수요 예배에 나온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건강이 없으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차가 없으면 나올 수가 없습니다. 믿음과 열심이 없으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오늘 나에게 주시는 은혜를 깨닫지 못한다면, 은혜를 헛되이 받은 것입니다. 날마다 주시는 은혜를 당연한 것으로, 익숙한 것으로 여겨서는 안됩니다. Appreciate 해야 합니다. 감사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배신자 베드로를 찾아오셔서 물어보신 것은 딱 한 가지였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것만 확실하면, 내가 피로 값 주고 산 양들을 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교회를 섬길 때에 끊임없이 확인하여야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가, 입니다. 그것을 잃어버렸으면, 다시 회복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을 시험하는 원망과 불평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어린 아이와 같이 겸손하였던 처음 믿음으로 돌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은혜에 감격하여서 주님을 위해서는 어디든지 갈 수 있고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고백하였던 그 첫 사랑을 가지고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