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함을 온전히 이루라 (고후 6:11-7:1)

 

고린도후서 611절로 13절은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바울의 호소입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유대주자들 (Judaizers)이 침투해서, 바울을 비판하고, 바울과 교인 사이를 이간하였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전하는 순수한 복음과 다른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방인들도 유대인들처럼 할례를 받아야만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바울을 따르지 않고 자신들을 따르게 하기 위해서 바울을 비판하고 이간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인들의 마음이 바울을 향하여 닫히게 되었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지요.

 

Warren Wiersbe 목사님은 오늘 본문 앞에 나오는 61절로 10절의 제목을 ‘an appeal for appreciation’ 이라고 붙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고린도 교인들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었는지를 상기시켰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바울과 동료 사역자들을 향해서 마음을 열라고 호소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 문은 너희를 향하여 넓게 열려져 있으니, 너희도 좁은 마음을 넓게 열라고 호소하는 것입니다.

 

이어서 14절은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신명기 2210절에서 나온 말씀입니다: “너는 소와 나귀를 겨리하여 갈지 말라.” (Thou shalt not plow with an ox and ass together). 공동 번역으로 보면, “소와 나귀를 한 멍에에 메워 밭을 갈지 말라고 번역하였습니다. 멍에는 두 마리의 소 어깨를 묶는 기구입니다. 한 멍에 아래 두 마리의 소가 묶이는 것입니다. 두 마리의 소가 한 멍에를 메고, 함께 밭을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소와 전혀 다른 나귀를 한 멍에로 묶고 밭을 갈라고 하면, 이 둘이 보조가 잘 맞지 않겠지요? 그런데 신명기 2210절 바로 앞에 9절을 보면, ‘포도원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라고 하였고, 11절에 보면, ‘양털과 베실을 섞어 짠 옷을 입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한국에서 나온 신학교의 어떤 구약 교수님은 비빕밥을 안 드셨습니다. 아마 섞어 찌게도 안 드셨을 것입니다. 아마 면과 폴리에스테르가 섞인 옷도 안 입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 주석을 보면, 소와 나귀를 한 멍에로 묶지 말라는 말씀에는 제의법적인 뜻이 있다고 합니다. 곧 소는 정결한 동물이고 나귀는 부정한 동물이기 때문에, 같은 멍에 아래 묶지 말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바울도 그런 맥락에서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메지 말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14절로 16절에 보면, 신자와 불신자는 함께 함 (fellowship), 사귐 (communion), 조화 (concord), 상관 (have in common), 일치 (agreement)가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두 사람이 한 멍에 밑에 묶였는데, 한 사람은 의의 길로 가자고 하고, 다른 한 사람은 불의의 길로 가자고 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은 빛의 길로 가자고 하고, 다른 한 사람은 어둠의 길로 가자고 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은 주님을 따라가자고 하고, 다른 사람은 사탄 (벨리알)을 따라가자고 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전에 가자고 하고, 다른 사람은 우상의 전에 가자고 하는 것입니다. 어찌 함께 함과 사귐과 조화와 상관과 일치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경우에 두 사람은 신앙의 길보다는 불신앙의 길로 가기 쉽습니다. 믿음의 도리를 포기하고, 불신앙과 타협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좁은 길을 포기하고, 넓은 길로 가지 쉽다는 것입니다.

 

Ironside 목사님의 강해집에 이런 예화가 나옵니다. 어떤 아이가 들에서 방울새 (linnet)를 잡았습니다. 집에 가지고 와서, 카나리아 (canary)와 같은 새장에 넣었습니다. 카나리아의 아름다운 노래를 듣고 배우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카나리아가 방울새 소리를 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유행가 부르는 남자와 찬송가 부르는 여자가 결혼을 했는데, 두 사람이 함께 예배에 참석해서 찬송가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이 가라오께를 틀어 놓고 함께 유행가를 부르는 가정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쉽상입니다. 그것이 넓은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오늘 본문 17절은 이사야 5211절을 인용합니다: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이사야 본문에서는 포로 생활하던 바벨론에서 나오라는 말씀입니다. “나와서 따로 있으라는 명령은 영어로 “come out” 그리고 “be separate” 입니다. 죄악된 땅 바벨론에서 떨어져 나와서, 거룩한 땅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라는 말씀입니다.

 

계시록 17장과 18장은 바벨론을 종말적으로 해석합니다. 계시록 17 5절은 바벨론을 음녀라고 부릅니다. 일찌기 바벨탑은 하나님을 반역하는 교만한 인간 정신이 표현된 것이었습니다. 구약에 나오는 바벨론, 역사에 실재하였던 바벨론은 교만하고 타락하였던 큰 도성이었습니다.

 

그러면 큰 음녀로 표현된 상징적인 바벨론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대표적인 주석가들의 해석을 몇 가지 들어보면, 하나님을 떠난 세속적인 문화와 문명이라고 주석한 사람도 있고, 하나님을 적대하는 모든 정치, 경제, 군사적 체제라고 본 사람도 있으며, 성도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떠나도록 유혹하는 세상을 가리킨다고 주석한 분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음녀 바벨론이란 사도 요한이 사용하는 세상이라는 단어와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한이 말씀하는 세상이란 하나님께 반역하는 악한 세상을 가리킵니다. 요한이 말씀하는 세상이란 그러한 신학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칼빈은 요한이 가리키는 세상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도록 우리의 관심을 빼앗아 가는 모든 인간들의 제도와 철학과 활동들이다.

 

하나님을 반역하는 세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는 세상, 하나님을 떠난 이 세상은 사탄의 지배하에 있습니다. 요한일서 5 19절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에게 처해 있다”고 말씀합니다. 타락한 세상의 모든 사상과 제도와 문명은 인간으로 하여금 조물주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하도록 영안을 흐리게 하고, 이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착각에 빠지게 하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도록 부추킵니다. 하나님을 인정치 않도록 설득합니다.

 

요한이 말씀하는 세상이란 그처럼 하나님이 없는 무신의 세상,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불신의 세상, 하나님을 거역하는 세상, 죄악된 세상을 가리키는데, 그러한 세상이 바로 계시록의에 나오는 바벨론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바벨론을 음녀로 의인화한 것은 죄악된 세상이 성도들을 미혹하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세상은 음녀와 같이 돈과 권력으로 성도들을 미혹합니다. 계시록 17 2절에서 땅의 거민들이 음녀와 음행을 한다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세상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쾌락을 추구하고 돈과 권력을 붙드는 것입니다. 재물을 섬기는 것입니다. 진정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 대신에 세상의 우상을 섬기는 것이 성경 전체가 말씀하는 영적인 간음입니다. 세상은 호리는 음녀와 같이 돈과 권력과 쾌락으로 성도들을 미혹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벨론의 멸망을 말씀하는 계시록 18장에 가장 중요한 구절은 4절입니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을 받지 말라.” 바벨론의 멸망과 그에 대한 애가 가운데, 하늘로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말씀이 들렸는데, 곧 바벨론에서 나오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바벨론의 죄에 참예하지 않음으로써, 죄에 대한 심판과 재앙을 면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언제나 죄악된 세상으로부터 택하신 자를 불러내셨습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셨고, 멸망당할 성읍 소돔에서 롯을 불러 내셨습니다. 헬라어로 교회를 ‘에클레시아’입니다. ‘에클레시아’의 어원은 부르다는 뜻의 ‘클레오’입니다. 영어로 call 입니다. 그러므로 ‘에클레시아,’ 곧 교회는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바벨론에서 나오라고 부르십니다. 불려 나온 사람들이 이룬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그처럼 멸망당할 바벨론으로부터 주님이 부르신 백성이 에클레시아, 교회입니다.

 

유월절 어린 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구속하여 주신 하나님은 우리를 음녀 바벨론과 같은 죄악된 세상,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 받을 이 세상으로부터 우리를 불러 주셨고, 또한 하늘의 예루살렘 거룩한 성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인도하여 주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천국에서 찬송을 부르는 백성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다윗은 시편 23편에서 목자 되신 하나님이 그 양들을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지름길로, 혹은 편한 길로 인도하신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의의 하나님은 자기 이름을 위하여 그 양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십니다. 의의 길은 때로 험난한 길입니다. 예수님도 마태복음 7 13절로 14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이사야 42 6절로 7절에는 바벨론에서 구원받은 백성의 사명이 나옵니다: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네가 소경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옥에서 이끌어내며, 흑암에 처한 자를 영창에서 나오게 하리라.

 

죄악된 세상에서 나오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세상을 등지라는 말씀으로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세상과 담을 쌓고 사는 것은 성경적인 삶이 아닙니다. 성경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 천국의 누룩이 되라, 세상을 변화시키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바벨론으로부터 나오라는 말씀은 두 가지로 적용할 수 있는데, 소극적으로는 세상에 물들지 말라는 것이요, 적극적으로는 세상을 변화시키라는 말씀입니다.

 

Ironside 목사님의 강해집에 나오는 예화를 한가지 더 소개해 드립니다. 이 목사님이 켈리포니아 산호세에서 집회를 하는데, 어느 여자분이 독창을 하였다고 합니다. 너무나 아름답고 성악적으로 잘 훈련된 목소리로 “Jesus Satisfies” 라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천사가 노래를 하는 것 같았고, 목사님도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합니다. 목사님은 늘 하던 대로, 기도나 상담을 받기 원하는 사람은 집회 후에 자리에 남으라고 광고하였습니다.

 

어떤 부인이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목사님이 가서 물었습니다. 영혼의 갈급함이 있으십니까? 여인은 대답하였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저는 영혼의 갈급함이 있었고, 크리스챤이 되려는 마음을 가지고 이 자리에 왔습니다. 그런데 오늘 저 여자의 독창을 듣고 마음이 달라졌습니다. 그러면서 독창을 한 여자의 이름을 말했습니다.

 

목사님은 그 여인에게 물었습니다. 아까 독창을 한 그 성악가를 개인적으로 아십니까? 그러자 이 여인은 자기의 best friend 라고 대답했습니다. 목사님은 다시 물었습니다. 그런데 왜 당신의 best friend인 그 독창자의 노래 때문에 크리스챤이 되지 않겠다고 하십니까? 여인은 대답하였습니다. best friendJesus Satisfies 라는 노래를 불렀는데,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제 친구는 예수로부터 만족을 얻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에서 만족을 찾는 사람입니다. 저와 똑같이 극장에 다니고, 춤추러 다니고, 카드 놀이를 합니다. 크리스챤이라면 세상 사람과 달라야 하는 것 아닙니까? 저 친구와 저는 다를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전에 우리 교회 청년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성당에서는 청년부 신입생 환영회를 한 다음에, 청년회장이 손수 술잔을 돌린다고 합니다. 교회 지하층에서 공식 행사로 술파티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지 않는 친구들이 좋아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당시는 좋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언젠가 영혼의 갈급함 때문에 하나님을 찾아 나온다면, 술 마시는 공동체를 찾지는 않을 것입니다. 모여서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성경을 공부하는 공동체를 찾아올 것입니다. 크리스챤의 능력은 거룩 (구별됨)에 있습니다. 그것이 경건의 능력입니다.

 

사모에게 들어보니, 이번 711일 수요일에 우리 교회에 오셔서 찬양과 치유 집회를 하시는 한의사 선교사님은 연세에도 불구하고 건강이 매우 좋으시다고 합니다. 당연히 그래야 하겠지요? 한의사가 몸이 약해서 다 죽어가면서 보약을 사라고 하면, 누가 사겠습니까? 기독교인은 신약과 구약을 팔러 다니는 사람인데, 전도하는 사람이 영적으로 강건하지 못하면 누가 그 신약과 구약을 사겠습니까? 세상과 구별되지 않은 사람은 세상에 영향력을 끼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이 세상에서 감당하기 위하여 우리는 세상과 구별된 그리스도의 성품을 소유하여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어두운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빛이 되라고 우리를 어두운 세상에서 불러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빛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어두운 세상에 복음의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바벨론에서 불러내신 그 부르심에 상을 따라가는 복된 하나님의 백성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