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술적 문제로 설교 녹화가 되지 않아서 설교문을 올립니다.


선지자들의 증거 ( 9:25-33)

 

오늘 본문 바로 앞의 24절에보면, 하나님이 절대 주권을 가지고 선택하실 때에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도 부르신다고 말씀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만 선민이라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하나님이 이방인을 유대인과 동등하게 대우하신다고 말하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큰 모독으로 들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는 구약의 선지서들을 통하여 그 사실을 입증합니다. 먼저 하나님은 이방인도 구원하신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호세아의 글을 인용합니다. 이어서 유대인이라고 다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일부만 구원받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이사야의 글을 인용합니다.

 

이렇게 바울이 호세아와 이사야를 인용하는 오늘 본문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약의 예언에 대하여 몇 가지 사전 지식이 필요합니다. 먼저 구약의 예언들은 그 내용을 두 가지로 대별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죄에 대한 심판의 예언이고, 다른 하나는 구원과 회복 그리고 위로의 예언입니다. 구약에 수많은 예언들이 있지만, 하나님의 공의에 입각한 심판과, 하나님의 사랑에 입각한 구원의 메시지로 나누어집니다.

 

대부분의 예언서들은 심판의 예언으로 시작해서 구원의 예언으로 끝납니다. 대표적으로 이사야서는 1장부터 39장까지는 심판의 메시지이고, 40장부터는 66장까지는 회복과 위로의 메시지입니다. 구약이 39권이고 신약이 27권인 것과 마찬 가지입니다.

 

또 한가지는 구약의 예언들이 언제 이루어지는가 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예언은 2중적으로 성취됩니다. 먼저는 선지자가 예언을 하는 그 시대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이것을 역사적인 성취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구약의 예언들이 그처럼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성취되는 것으로 그친다면, 우리에게는 큰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의 예언들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종말적으로 성취되기 때문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구약의 예언은 죄에 대한 심판과 구원의 메시지입니다. 이 공의의 심판과 사랑의 구원이 어디서 궁극적으로 성취되었는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성취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님 재림하시는 최후 심판에서 완성될 것입니다.

 

요약하면, 구약 선지자들이 예언한 심판과 구원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일차적으로 성취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최종적으로 완성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예언의 이중적 성취를 역사적인 성취와 종말적인 성취라고도 할 수 있고, 구약적인 성취와 신약적인 성취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기본 지식을 가지고, 먼저 호세아 선지자의 증거를 살펴보겠습니다. 호세아는 북왕국 이스라엘이 앗시리아에 멸망당하기 직전에 활동한 선지자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에게 특별한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그것은 음란한 아내, 곧 다른 남자와 놀아나는 여자와 결혼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여자가 다른 남자와 바람이 나서 도망가면, 찾아 가서 값을 주고 다시 사오라는 명령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여자를 또 다시 사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어찌하여 그처럼 잔인한 명령을 선지자에게 내리셨을까요?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하나님의 심정을 가르치신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 보시기에 음란한 아내와 같았습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에게 절하며, 하나님의 법도를 져버리고 세상 풍속을 쫓기 일쑤였습니다.

 

그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람나서 집을 나간 아내와도 같이 하나님을 배반하였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들을 끝까지 버리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호세아 선지자의에게 삶을 통하여 체험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그 자식들의 이름까지 지어 주셨습니다. 첫 아들의 이름은 이스르엘이라고 지어 주셨습니다. 이스르엘은 지명인데, 예후가 요람 왕과 그 어미 이세벨을 죽여서 던져버린 땅의 이름이었습니다. 이는 장차 앗수르의 군대가 쳐들어와서 북왕국을 멸하고 백성들을 흩어버릴 것을 상징하는 이름이었습니다.

 

두번째 낳은 딸의 이름은 로루하마라고 지어 주셨습니다. 히브리어로 는 영어로 No라는 뜻이고, 루하마는 긍휼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로루하마 No Mercy, 곧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북왕국의 죄에 대하여 심판하시고 흩으실 때에, 긍휼히 보시지 않으실 것을 상징하였습니다.

 

세번째로 낳은 아들의 이름은 로암미라고 지으셨습니다. 역시 No라는 뜻이고, 은 백성, 그리고 My라는 소유격 어미입니다. 그래서 --라는 말은 Not My People, 곧 ‘내 백성이 아니다’ 라는 의미입니다. 흩어 버리시고 긍휼히 보지 않으시며 자기 백성으로 여기지 않으시는 하나님 공의의 심판을 예언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결코 버리실 수 없는 언약의 자녀였습니다. 우리 인간들도 자녀가 용서할 수 없는 불순종을 할 때에, ‘너는 내 자식이 아니다’ 라고 말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부모의 마음 속으로는 이미 정반대의 말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야, 너는 내 자식이야.’ 마찬 가지로, 하나님은 심판의 메시지를 주시면서, 동시에 회복과 위로와 구원을 약속하십니다.

 

그것이 오늘 바울이 25절에서 인용하는 호세아서 2 23절입니다: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한 자라는 -루하마에서, 자를 뺀 루하마, 곧 긍휼히 여김을 받은 자, 사랑하는 자로 삼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내 백성이 아니라는 -암미에서 자를 뺀 암미, 곧 내 백성으로 삼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 구원의 예언들은 먼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해석하는 바와 같이, 이 예언은 신약 시대에 이방인들이 구원받을 것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백성이 아니었던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라는 예언인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 10절도 호세아의 예언을 이방인에게 적용하여,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라고 말씀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던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며, 어떻게 긍휼을 얻지 못하던 자들이 긍휼을 얻는 자가 되었습니까? 에베소서 2 11절로 13절은 말씀합니다: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며,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이방인들은 본래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으나,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피로 싸인해 주셔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인치셨기 때문에,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은 이방인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셨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바울은 호세아서를 인용하였습니다.

 

다음으로 바울은 유대인의 소수만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이사야서를 여러 곳 인용합니다. 27절은 이사야서 10 22절과 23절을을 인용합니다: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 그리고 29절은 이사야 1 9절을 인용합니다: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시지 아니하셨다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오늘 본문에 인용된 이사야의 예언들 속에도 심판과 구원이라는 두가지 메시지가 들어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와 같이 죄악을 철저히 도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말씀합니다. 필하시고 끝내시리라, 심판이 반드시 철저히 임함을 말씀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남은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납니다.

 

또한 이 이사야의 예언들도 일차적으로는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이루어진 예언입니다. 곧 북 이스라엘 왕국이 앗수르에 멸망당할 것이지만, 남은 자들은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올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나아가서 남유다도 바벨론에 멸망당하고 포로로 잡혀가겠지만, 남은 자들은 예루살렘 고토로 돌아올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의미는 유대인들이 다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 남은 자, 곧 소수만이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33절의 인용된 이사야서 28 16절과 8 14절은 유대인들이 돌에 부딪혀 넘어졌다고 말씀합니다. 이 돌에 대해서는 돌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베드로가 일가견이 있었습니다. 그는 말하자면 돌의 신학자였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은 돌에 대하여 말씀하는 구약의 예언들을 두루 인용하면서, 그 뜻을 설명합니다.

 

이 돌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믿는 자에게는 구원의 반석이 됩니다. 하나님은 시온에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두셨는데, 저를 믿는 자는 심판 날에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한다고 하셨습니다. 그처럼 예수님은 믿는 자들에게는 구원의 모퉁이 돌이 되시지만, 복음에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어 넘어지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바울도 유대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십자가의 도에 걸려 넘어졌음을 증거하기 위하여,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인용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화려한 메시야를 기대했습니다. 이것은 죄악된 인간의 본능입니다. 너희는 이 세상을 사랑치 말라, 곧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버리라고 하였는데, 이것을 버리기가 참으로 힘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메시야가 말 구유에 나셨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천한 나사렛 지방의 목수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자기들의 메시야가 유명한 랍비 밑에서 변변한 교육 한번 받아보지 못하였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로마를 정복할 힘있는 군사적 지도자가 아니라, 로마 병정들에게 힘없이 끌려가서 죽은 사람이 자기들의 메시야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도 진짜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道였습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공로를 무효로 만듭니다. 십자가는 인간이 자기 힘으로는 율법을 지킬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을 보내셔서 십자가에서 율법의 요구를 이루셨다고 선언합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전에 “다 이루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오직 이것이 구원의 길이라고 선언합니다.

 

유대인들을 그러한 십자가를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십자가는 스스로 율법을 온전히 지킴으로, 곧 자신의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였던 유대인들의 교만을 여지없이 무너뜨리는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율법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거룩하고 선하며 의로운 것이지만, 죄성에 물들어 그것을 지킬 수 없는 인간들에게 죄와 사망을 선언하는 형법이 된다고 말씀합니다. 곧 하나님의 공의는 너무나 엄위하시기 때문에, 그 많은 율법 조항들 가운데 하나만 범하여도 불합격이 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2 10절은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된다”고 말씀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다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마치 자기가 하나님처럼 의로울 수 있다는 교만입니다. 유대인들의 교만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자신의 행위로 하나님의 의에 도달할 수 있다는 교만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유대인들에게 그들이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고자 하는 그 모든 노력들은 다 헛된 것이며, 그들의 구원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십자가의 복음이야 말로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거치는 돌이 되었던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유대인은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들이 아무리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들이 아무리 브리타니카 대백과 사전보다 더 큰 분량의 탈무드 내용을 숙지하고 그대로 살려고 노력했다고 하더라도, 십자가를 받아들이지 못하면 구원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처럼 행위를 의지한 유대인들이 구원을 받지 못하였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가장 큰 위험은 행위에 의지하려는 위험입니다.

 

평생 교회에 다녔으므로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봉사를 많이 함으로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헌금을 많이 하면 하나님이 지옥에 보내시려다가도 생각을 바꾸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 부모가 내 조부 조모가 큰 믿음의 소유자였으므로, 나는 슬슬 해도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다 예수를 믿기 시작할 때에는 순수한 믿음으로 시작합니다. 자랑거리가 하나도 없습니다.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다가 교회에 관록이 붙으면 붙을수록 자신의 행위와 공로를 자랑하게 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3 3절에서 “너희가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려느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행위의 교만에 가득 차 있던 바리새인들에게, 너희들보다 세리와 창녀들이 하늘 나라에 먼저 들어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그처럼 자신들의 죄와 위선을 폭로하는 주님을 죽이고자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스데반이 “목이 곧고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고 설교할 때에도, 유대인들은 이를 갈며 벌떼처럼 달려 들어서 돌로 쳐 죽였습니다. 유대인들의 자존심을 짓밟았기 대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합니다. 아무 육체라도 주 앞에서 자랑치 말라. 내게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느니라.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축복들, 곧 율법과 선지자와 언약과 예배와 훌륭한 믿음의 조상들이 오히려 그들을 교만하게 만드는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런 것이 없었던 이방인들은 오히려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에 겸손히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가난한 자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 의를 자랑하는 바리새인이 아니라, 멀리서 가슴을 치며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불쌍히 여기소서’ 기도하던 세리를 의롭다고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도 마음 속에 가득한 헛된 자랑을 다 내어 버리고, 하나님이 은혜 주시기에 합당한 가난한 마음을 소유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호세아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자신들에게 적용해 보기를 원합니다. 호세아 선지자의 음란한 아내 고멜이 다른 남자에게로 도망갔을 때에,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3 1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즐길지라도 나는 저희를 사랑한다. 너도 타인과 연애하고 있는 음부된 그 여인을 사랑하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섬기면서, 뒤로는 우상도 섬기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이외의 다른 신에게 눈을 돌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들을 변함없이 사랑하셨습니다. 그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호세아에게 값 주고 고멜을 다시 찾아오라고 명하십니다. 이 호세아 선지자가 마음이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얼마나 자존심이 구겨졌겠습니까? 그러나 호세아는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신가를 또한 깨달았을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도 음란한 여인 고멜과 크게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과 짝하여 하나님을 떠나 음부와 같이 살아가는 우리들을 하나님은 여전히 사랑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뒤로하고 재물의 신을 섬기며 쾌락의 노예가 되어 죄에 종 노릇하던 우리를 위해서 아들의 피로 값을 치르고 자유케 하셨습니다.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신부로 삼아 주셨습니다.

 

값 주고 사왔다는 구속 (redemption) 이라는 단어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복음의 감격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호세아가 고멜을 값 주고 사온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사셨습니다. 은 열 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이 아니라,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값 주고 우리를 구속하신 것입니다.

        

호세아는 값 주고 찾아온 고멜에게 말했습니다. “다시는 행음하지 말고 다른 남자를 좇지 말라.” 예수님이 요한복음 8장에서 간음한 여인에게 하신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 이 여인을 정죄하며 돌로 쳐 죽이려던 사람들이 물러가자, 주님께서 여인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치 아니하노라.”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베드로전서 1장도 너희가 구속된 것이 금이나 은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 모든 행실에서 거룩한 자가 되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피로 구속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거룩한 삶을 요구하십니다. 순결은 구원의 열매입니다. “내가 너를 이렇게 용서하고 사랑하였으니, 이제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피로 구속받은 여러분 모두가 세상과 벗하지 아니하고, 일편단심 주님을 섬기시는 정결한 그리스도의 신부가 다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