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하나님께 미친 사람 (고후 5:11-15)


오늘 본문 13절에 우리가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실제로 바울이 헤롯 아그립바 왕과 베스도 총독 앞에서 자신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회심한 사건을 이야기하자, 사도행전 2624절에 보면, 베스도가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라고 크게 소리쳤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정신 차린 말을 하나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예수님도 미쳤다는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누구에게 그런 소리를 들으셨습니까? 마가복음 321절에 보면, 가족 혹은 친족들로부터 미쳤다는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볼 때에,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정상이 아닙니다. 내가 세상 사람들이 볼 때에, 지극히 정상이다, 그러면 과연 자신이 진짜 크리스챤인지, 심각하게 고민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설교를 준비하면서, Eric Sneider 라는 목사님의 설교에서 유머 예화를 읽었습니다: There is a story about a legalistic Seminary student who wanted to have a scriptural basis for everything he did. He felt he was on solid ground if he could quote Bible book, chapter & verse to okay his actions.


He did all right with that until he began to fall in love with a beautiful girl. He wanted very much to kiss her, but he just couldn’t find a scripture to okay it. So, true to his conscience, he would simply walk her to the dormitory each night, look at her longingly, & then say "Good night."


This went on for several weeks, & all the time he was searching the Bible, trying to find some scripture to okay kissing her good night. But he couldn’t find one, until finally he came across that passage in Romans that says, "Greet each other with a holy kiss." He thought, "At last, I have scriptural authority for kissing her good night."


But to be sure, he went to his hermeneutics professor to check it out. After talking with the professor, he realized that the passage dealt more with a church setting than with a dating situation. So once again he simply didn’t have a passage of scripture to okay kissing his girl good night.


That evening he walked her to the dormitory & once again started to bid her "good night." But as he did, she grabbed him, pulled him toward her, & planted a 10-second kiss right on his lips.


At the end of the kiss, the Seminary student gasped for air, & stammered, "Bible verse, Bible verse." The girl grabbed him a 2nd time, & just before kissing him again, said, "Do unto others as you would have them do unto you." 무엇을 하든지, 그 행동을 정당화시켜 줄 수 있는 성경 구절을 찾았다는 이 신학생은 누가 보아도 이상한 사람일 것입니다.


유명한 A. W. Tozer 목사님은 <The Root of the Righteous> 라는 책에서, 세상 사람들이 볼 때에 진정한 크리스챤이 얼마나 이상한 사람인가를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A real Christian is an odd number anyway. He feels supreme love for One whom he has never seen, talks familiarly every day to Someone he cannot see, expects to go to heaven on the virtue of Another, empties himself in order to be full, admits he is wrong so he can be declared right, goes down in order to get up, is strongest when he is weakest, richest when he is poorest, and happiest when he feels worst. He dies so he can live, forsakes in order to have, gives away so he can keep, sees the invisible, hears the inaudible, and knows that which passes knowledge.


오늘 본문 14절에 보면, 크리스챤을 그처럼 변화시키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대속의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러한 대속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세상 사람들이 볼 때에, 이상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15절 말씀처럼, “다시는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사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H. A. Ironside 목사님은 Campbell Morgan 목사님의 일화를 소개합니다: I remember very well hearing Dr. G. Campbell Morgan say that a great crisis came into his life when he first gave up his place as a schoolmaster to become a minister of Christ. It was a very solemn moment when he was set apart to the work of the Lord, and when he got home that night and went to his room, he fell down on his knees before God, and he was sure he could hear the Lord saying to him, “Now, Morgan, you have been set apart definitely for the ministry of the Word. Do you want to be a great preacher, or do you want to be My servant?”


His first thought was, “Oh, I want to be a great preacher; surely there is no more laudable ambition that that.” But why should the Lord put it that way – “Do you want to be a great preacher, or do you want to be My servant?” And he said, “Why can I not be His servant, and a great preacher?” He went through a time of real soul-struggle, and then the thought came that it might be in the will of God that as servant of Christ his ministry should be a very obscure one, and he cried, “O blessed Lord, I would rather be Thy servant than anything else!” 주님은 캄벨 몰간 목사님에게 자신을 위하여 살 것인가, 아니면 주님을 위하여 살 것인가, 그것을 물으셨던 것입니다.


14절에 강권한다는 단어는 영어 성경에 compel 이나 control로 번역되었는데, King James 성경은 constraint로 번역하였습니다. 그러나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강제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기쁨과 즐거움으로 주님을 섬기도록 한다는 의미입니다. 대속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은 너무 감격한 나머지, 더 이상 자신을 위해서 사는 세상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크리스챤이 된다는 것입니다.  


15절에 대신 죽으셨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대속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인물이 있습니다. 바라바라는 사람입니다. 도날드 그레이 반하우스 (Donald Grey Barnhouse) 목사님은 <하나님의 치유> (Gods Remedy) 라는 책에서 바라바가 경험하였던 십자가를 상상해 봅니다.


바라바는 민란을 일으키고 살인을 자행한 흉악범으로 체포되었습니다. 그는 사형을 선고받고 십자가 형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자기 손바닥을 만지면서 대못이 자기 손에 박힐 때에 얼마나 끔찍하게 아플까를 생각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십자가에 달려서 며칠 동안 고통당하며 죽어가던 모습을 기억하며 얼마나 고통스러울까를 상상하였습니다. 어디선가 망치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아 불안하였습니다.


그 때에 밖에서 군중들이 떠들썩하게 소리치는 것이 들렸습니다. 사람들이 바라바, 바라바, 하면서 자기 이름을 부르는 것 같았습니다. 성난 군중들이 자기를 죽이라고 소리치는 것 같았습니다. 드디어 간수가 나타났습니다. 이제 자기가 십자가에 달릴 때가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간수는 자신의 몸에 매인 사슬을 풀어주었습니다. 그리고 너는 이제 자유의 몸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어찌된 일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가 밖으로 나와 보니, 군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고 있었습니다. 그는 사건의 전말을 전해 듣게 됩니다. 빌라도가 예수와 바라바 중에 누구를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었고, 군중들이 자신의 석방을 요구했다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군중들에게 예수를 내어주며 자신은 무죄하다고 물로 손을 씻었습니다.


채찍에 맞아 피투성이가 된 예수라는 사람이 십자가를 지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바라바는 군중들을 헤치고 예수를 따라가기 시작합니다. 예수가 십자가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자꾸 넘어지는 것이 보였습니다. 로마 군병이 옆에서 구경하던 구레네 사람 시몬을 지목해서 대신 십자가를 지게 합니다.


결국 행렬이 골고다 언덕에 도달하였습니다. 예수가 십자가 위에 눕혀지는 것을 보면서, 그의 손과 발에 못을 박는 망치 소리를 들으면서, 바라바는 몸서리를 쳤습니다. 바로 저 자리에 지금 내가 있었을 텐데, 저 못이 내 살을 뚫었을 텐데, 지금 내가 저 비명을 지르고 있을 텐데, 온갖 그런 생각에 소름이 끼쳤습니다.


그 때에 예수의 기도 소리가 들립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십자가가 공중에 세워집니다. 어둠이 임하고 백부장이 공포에 질려서 말합니다: “이는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십자가 위에서는 “다 이루었다”는 소리가 들립니다.


바라바는 자기가 달려야 할 그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는 예수님 때문에 자유의 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무 공로 없이 죄와 사망의 형법에서 해방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는 큰 깨우침이 임하였습니다: ‘그는 내 대신 죽었다, 예수여 당신은 내 대신 죽으셨습니다.


교회사의 전승에 의하면, 바라바는 나중에 전도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 분은 내가 당할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그는 제가 달려야 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는 제 대신 죽으셨습니다. 실로 바라바는 성경에 나오는 가장 상징적인 죄인입니다. 예수님이 죄인의 죄 값을 대신 치루신 대속의 사건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마지막으로, 성경에는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자신의 가장 귀한 향유 옥합을 깨서 예수님께 부어드린 여인이 있습니다. 이 여인에 대한 기사는 네 복음서에 다 나옵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사람들이 다 아는 죄 많은 여인이 예수님의 발을 눈물로 적시고 머리털로 씻은 다음에 향유를 부었습니다.


그 때에 옆에서 그 여인을 보면서, 미쳤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가룟 유다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였지만,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유익을 위하여 주님을 따르던 사람이었습니다.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의 눈에는 은혜 받은 사람의 헌신이 다 지나쳐 보입니다. 왜 저렇게 기도를 하나, 왜 저렇게 봉사를 하나, 왜 저렇게 헌금을 하나, 다 지나치다고 평가합니다.


가룟 유다의 눈에 마리아의 행동이 그러하였습니다. 저 향유를 팔면 삼백 데나리온은 족히 될 것인데, 그 돈으로 가난한 사람들이나 도와주지, 라고 비판하였습니다. 삼백 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의 일년 임금이었다고 합니다. 오늘날 미국으로 말하면 그 가치가 수만불에 달하는 것입니다. 헌신이라는 것은 마리아의 경우처럼 자기에게 아주 소중한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수준에서 드리는 것은 헌신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신 것은 자신의 생명보다 더 귀한 독자 이삭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어 주신 것도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요한일서 4 9절로 10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로마서 5 8절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죽으시려고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시려고 오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독생자를 내어 주신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독생자를 내어주 신 것은 말하자면 옥합을 깨뜨리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아낌없이 십자가에서 몸 버려 피 흘려 자신을 바치셨습니다. 그것도 옥합을 깨뜨리는 것이었습니다. 메시야의 수난을 노래하는 시편 22 14절로 15절에 “나는 물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촛밀같이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잇틀에 붙었나이다”고 하였습니다.


그처럼 다 쏟아 부어 주신 그 사랑에 감격한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 4 6절에서 자신도 “관제와 같이 부음”이 되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관제는 마지막에 포도주를 제단에 붓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 자신을 마지막까지 다 부어드리고 싶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장 귀한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고,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시기까지 희생 제물이 되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그 희생에 빚진 자들입니다. 우리가 그 은혜를 기억하며 오늘도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비단 이 예배 시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 전체가 산제사로 바쳐지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헌신과 봉사를 통하여 가장 귀한 이삭을 주님의 제단에 드리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삶이 주님께 가장 귀한 옥합을 드리는 이름다운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 ‘사랑하는 주님을 위하여 제 자신을 다 부어드리겠습니다’ 하는 마음으로 가장 귀한 것으로 헌신하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립니다.